經典(경전)-天符經外(천부경외),

天符經(천부경)

華谷.千里香 2011. 10. 3. 12:40

 

 

天符經(천부경)

 

천부경은 천제환국(天帝桓國 :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조선의 단군을 말한다.

단황제(檀皇帝)를 단군이라 부름은 스스로를 중국의 변방 제후국으로 낮춰

부르는 이름이므로 여기서는 단황제라 칭한다.) 시대의 구전심서(口傳心書)이다.

단황제가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서 神市를 건설한 이래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전래되어 온 천부경은 천리(天理)와 부합(符合)되는,

즉 부절(符節)과 같은 경(經)이라 할 수 있는데,

오랜 옛날에 천심(天心)으로 마음을 삼아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덕으로써 덕을 삼아서 하늘을 받들었던 것아니,

아마도 이 글은 크게는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서 혹은 인민의

교화수단으로서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고, 작게는 수신(修身)에

관한 요결문(要訣文)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천부경은 비록 81자로 된 단독 경전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천리가 온전히 함축되어 있음을 막연하나마 느낄 수가 있으며,

참으로 우리 민족의 경전으로서 만세토록 전할 수 있는

진경(眞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묘향산의 석벽에서 천부경을 탑본했던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선생은 이 천부경 속에 환단상전(桓檀相傳)의

삼일심법(三一心法)이 들어 있다고 역설하셨고,

남사고(南師古, 서기 1509∼1571) 선생의 '격암유록' 등에

천부경을 운위한 것만 보아도 경문의 무궁한 조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두 분뿐이랴. 수많은 사람이 천부경에 대해 주해를 달았지만

열거하지 않았을 뿐이다.

천고의 진경 천부경에 대해서 야산선사(也山 李達 : 1889∼1958),

평생 스승없이 홀로 학문과 수도에 정진하여 일찍이 사서삼경을

비롯한 제가의 학문에 두루 막힘이 없었으며 특히 동양학문의

본바탕이 되는 '주역'에 온 힘을 기울여 그 심오한 뜻을

다 통하였으므로 훗날 '이주역'이라는 별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주역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로는 공자께서 비전(秘傳)한 선후천의

교역이치를 최초로 밝힌 乾九五圖說과 先後天考定說 등 다수가 있으며,

주역 원리를 바탕으로 동서양의 양력과 달력의 장점을 수렴한

새로운 시대의 책력인 '경원력(庚元歷 : 1944년 갑신년 창제 반포)과

'대학' 경전의 어긋난 순서를 바로잡은 '대학착간고정(大學錯簡攷正 :1957 정유년)등이 선생의 평생 역작으로 손꼽히며

이 밖에 '야산선생문집'이 있다.) 역시 남다른 관심을 가진 분이시다.

그러나 선사께서 대둔산이나 부여 은산에서 누누이 천부경을 해설하시고

사상을 드높이셨으련만 그것이 문자로 기록되지 아니하고 다만 도면 형식의

글만 문집 속에 남아 있으니 그저 애석하게 여길 뿐이다.

부여 은산에 삼일학원(三一學院)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치실 때,

언덕 한 모퉁이에 '단황척강지위(檀皇陟降之位)'라 새겨진 비석을 세우고 단을 만들어 단황의 뜻을 높이 기리고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천제(天祭)를 지내셨던 사실만 보아도 단황을 지극히 봉숭했음을 엿볼 수 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천부경은 단황의 통치서이자 심서(心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염(念)하고 송(誦)하는 가운데 마음으로 느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부경을 계속 염송하는 중에 개안(開眼)이 되더라는 이야기는

천부경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경지를 대변해 주는 말이다.


[해설]


一始无始一

하나(1 : 太極)에서 비롯되나 무(0 : 无極)에서 비롯되는 하나이고
(혹은 '일의 시는 무라 하나를 비롯하니라'로 해석할 수 있다.)


一은 태극(太極)이며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의 일이니

'하나'의 뜻으로 하늘을 가리킨 말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을 둥글다 하여 원(圓, ㅇ)으로 형상하였고,

이 하늘을 축소시켜 말할 때는 점(點,.)을 찍었으며,

하늘을 무한히 넓혀 말할 때는 일(一)자로 표현하였다.

'하늘 천(天)'자의 글자가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一과 大의 합성자로

이루어진 것이며 우주 만유(宇宙萬有)의 종시(終始)는 하늘, 즉 일(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바로 『주역』에서는 "大哉라 乾元이여 萬物이

 資始하나니..."라 한 것이다.

그러나 태극(太極)은 다름아닌 무극(无極)이다.

무극과 태극은 모습만 다를 뿐이지 똑같은 의미라는 뜻이다.

대개 유(有)는 무(無)에서 생기고 무(無)는 유(有)에서 생긴다.

주렴계(周濂溪) 선생이 "無極而太極"이라 하였고,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도 "無는 名天地之始요 有는 名萬物之母라(무는 천지의

시작을 이르고 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이른다)" 말씀한 바와도 같은 뜻이다.

『도덕경』에 "유는 무에서 생한다(有生於無, 40장)."하는 글이 있듯이

만약 무(無)가 없다면 유(有)가 없고 유(有)가 없은즉 무(無)는 의미가 없다.

또한 『도덕경』에는 "하늘이 일一을 얻음으로써 맑게 되고(天得一以淸),

땅이 일一을 얻음으로써 편안하게 되고(地得一以寧), 신이 一을 얻음으로써

신령하게 되고(神得一以靈), 골짜기가 一을 얻음으로써 채워지고(谷得一以盈), 만물이 一을 얻음으로써 생겨나고(萬物得一以生), 왕후가 一을 얻음으로써

천하를 바로한다(侯王得一以爲天下正)"고 하였다.

선천팔괘의 첫머리에 하늘괘인 일건천(一乾天)이 오고

주역 64괘의 머릿괘로 중천건(重天乾)이 처하는 것에서 一이 태극인

동시에 곧 하늘을 대표함을 알 수 있다.

주렴계(周濂溪) 선생이 '일즉무욕(一則無慾)'이라 하신 말씀은 바로

유무(有無)의 관계를 적절하게 밝히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글을 지을 때에 '일시무시일'은 무에서 유가 생한다는 의미요

'일종무종일'은 유는 결국 무로 돌아간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析三極 无盡本

셋(三才 : 天才, 地才, 人才)으로 지극히 나뉘는데(三極 : 天極, 地極, 人極),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


하나가 둘을 낳지만 그 둘은 합하여 다시 하나를 낳음으로써 셋으로 나뉘며,

이 셋을 天地人 三才라 한다.

삼재는 기본 바탕이 셋으로 이루어짐을 말하고 이 삼재가 지극히 작용함을

가리켜 三極이라고 한다.

하나가 셋으로 쪼개어 나뉘는 것은 양수가 양수로 나아가고 음수가 음수로

나아가 一而三 二而四가 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법도에 의한다.

복희씨가 팔괘를 시획한 원리도 삼재의 원리에 바탕하고 있으며,

이 소성팔괘를 중첩한 대성괘도 삼재의 도에 따라 하늘의 음양, 땅의 강유,

사람의 인의를 표상하는 여섯 가지 위(位)를 갖추고 있다.

천부경에는 三字가 여덟 차례(八回)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삼팔목도(三八木道)를 상징한다.

태극의 極이나 석삼극의 析은 모두 동방의 木道와 관련된다.

우리나라의 환인(桓因)과 환웅(桓雄)과 단군(檀君)으로 이어지는 세 계보

또한 삼목(三木)이고 공자께서 주역 단전에 목도(木道)를 언급한 괘 또한

셋(風雷益卦의 木道乃行, 風水渙卦의 乘木有功, 風澤中孚卦의 乘木舟虛)이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하늘 하나(一 : 천극)가 그 첫 번째(一)가 되고, 땅 하나(一 : 지극)가

그 두 번째가 되며, 사람 하나(一 : 인극)가 그 세 번째가 된다.
(혹은 '하늘은 하나를 얻어 첫째가 되고, 땅도 하나를 얻되 둘째가 되며

사람도 하나를 얻되 셋째가 되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삼재 중에서 각기 그 하나가 됨을 밝히는 한편

그 차례(생성 전개)가 하늘이 나온 다음 땅이 나오고, 땅이 나온 다음

사람이 나옴을 설명하고 있다.
천개어자(天開於子) 지벽어축(地闢於丑) 인생어인(人生於寅)의

순서와 같이 선중후(先中後)의 순서가 있는 것이다.

노자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고 말씀하셨다.


一積十鉅 无匱化三 (*匱는 '무너지다'는 뜻을 나타냄)

하나(一)가 쌓여서 열(十 : 시방 즉 상하팔방)로 톱질하니,

무너짐이 없는 셋(三 : 천지인 三界인 천계 지계 인계)을 화하여 이룬다.


하나가 계속 쌓이면 마침내 끝가는 수인 열(十)을 이루니,

곧 열로 톱질하는 것이다.

열을 말한 것은 열 다음에는 다시 하나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열로 톱질한다는 것은 시방세계에 두루 통한다는 뜻도 된다.

비록 셋으로 나뉘어도 그 근본 하나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무너짐이 없는 셋을 이룬다는 것은 천도와 지도와 인도

즉 삼재의 도가 행해지고 천계와 지계와 인계 즉 삼계가 화성됨을 이른다.

하도(河圖)의 수리(數理)로 살피면 생수인 1 2 3 4 5는 천도(天界),

성수인 6 7 8 9 10은 지도(地界), 그 수가 각기 짝하여 생성하는

수화목금토는 인도(人界)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하늘은 둘(二 : 음양)로써 그 셋(三)이 되고,

땅은 둘(二 : 강유)로써 그 셋(三)이 되며, 사람이 둘(二 : 인의)로써

그 셋이 된다.


천지인 삼재가 각기 一生二法에 따라 음양 두 가지로 나뉘며,

그 순서에 있어서는 천개(天開) 지벽(地闢) 인생(人生)의 차례에 따라

하늘이 제일 앞서고 땅이 뒤따르며 마지막에 사람이 나온다.

주역 설괘전에 "하늘의 도를 세우니 음과 양이요,

땅의 도를 세우니 유와 강이요, 사람의 도를 세우니 인과 의니,

삼재를 아울러 둘로 하니라(立天之道曰 陰與陽이요 立地之道曰 柔與剛이요

立人之道曰 仁與義니 兼三才而兩之라)"고 하였다.

음양은 천도의 氣, 강유는 지도의 質, 인의는 인도의 性에 해당한다.


大三合六 生七八九

셋을 크게 하여 여섯으로 합하고, (이 여섯이) 일곱과 여덟과

아홉(七八九)을 낳는다


앞서 天二(음양) 地二(강유) 人二(인의)를 말하였으니,

셋이 여섯으로 늘어남을 뜻한다.

주역에 "육효를 그림으로써 괘를 이루고,

육위로써 문채를 이룬다(六劃而成卦하고 六位而成章이라)"하 하였고,

또한 "六爻之動은 三極之道라"고 했으니 천지인 삼재의 도는 육으로써 나타난다는 말이다.

六은 곧 六虛 六合 六位 六爻의 六을 이르는데,

사상적으로는 만물의 모체가 되는 노음수(태음수)에 해당한다.

7은 소양수, 8은 소음수, 9는 노양수(태양수)이다.

삼천양지(三天兩地)의 수리로 팔괘를 살피면 어머니인 곤괘(坤卦 : )는 6이 되고 아버지인 건괘(乾卦 : )는 9가 되며, 세 아들괘( )는 각기 7이 되고

세 딸괘( )는 각기 8이 됨을 알 수 있다.

양실음허(陽實陰虛) 즉 양은 실하고 음은 허한 것이다.

괘상을 살펴보아도 6이 7 8 9의 모체가 됨이 자연히 나타난다.

7 8 9를 모두 더한 24 또한 노음책수에 해당한다.

또한 六에 天一一을 더하면 七이 되고, 地一二를 더하면 八이 되고

人一三을 더하면 九가 된다.

이는 천지인 삼재를 각각 삼변하여 물(物)을 이룸을 설명한 것이니,

天才는 삼변해서 건삼련(乾三連 : ) 三(1×3=3)으로 이루어지고

地才는 삼변해서 곤삼절(坤三絶 : ) 六(2×3=6)으로 이루어지며

人才는 삼변해서 지천태(地天泰) 九(3×3=9)로 이루어짐을 설명한 것이라

하겠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몸이 구규(九竅)로 이루어졌고, 마음 또한 태양의 밝음과

같으며 태양의 수는 九이므로 사람의 몸과 마음이 모두 구수(九數)로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수의 十은 체(體)요 九는 용(用)으로서 천지자연의 조화는

종시를 이루며 순환하는데 낙서(洛書)의 구수(九數)와 부합이 된다.


運三四 成環五七

셋(三)과 넷(四)으로써 수레를 굴리며(운전하며),

다섯(五)과 일곱(七)으로써 이루고 돌아간다(순환한다)
(혹은 '삼사로 운행하고 오칠로 고리를 이룬다'로 해석할 수 있다.)


셋은 삼변(三變), 넷은 사시(四時)와 통한다. 각기 세 달씩 춘하추동

사계를 이루는 것이 運三四의 이치이니 태극에 해당하는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의 마디 또한 이 運三四를 상징한다.

또 사방에 중앙을 합한 五方이어야 온전한 체를 이루게 되고,

여기에 상하를 더한 일곱으로써 공간구면을 이루게 되니,

이를 成環五七이라고 한다.

낙서의 구궁수(九宮數)에 기초한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살피면 5를 황극(皇極)이라고 하였다.

황극은 곧 큰 중심을 말하는데, 육효로 이루어진 대성괘를 살펴보아도

다섯 번째 자리가 중심이 되는 군위(君位)에 해당한다.

여섯으로써 대성괘의 위(位)를 이루는데, 극즉반(極則反)하여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오는 것이 일곱으로써 상징된다.

예를 들면 수뢰둔(水雷屯)괘의 상효는 곧 이를 뒤집어 도전(倒顚)한

산수몽(山水蒙)괘의 초효가 되는데, 이는 칠일래복(七日來復)의 도이다.

불가(佛家)의 108 법수(法數)와 관련해 동주학당의 최석기씨는 運三四와

成環五七의 관계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三(三才)에 四(四時, 四方)를 곱하면 十二가 되고 여기에 九를 곱하면

一百八이 된다."고 하였으며, "五와 七을 더하여 이 十二로 一百八에

주환(周環)하는 것이 구궁(九宮)을 이루었으니 매궁(每宮)에 十二란 것은

일일의 십이시와 일년의 십이월과 일원(一元)의 십이회(十二會)이다."고 하였다. 일일, 일년, 일원의 법수로서의 108을 '경(經)'이라 한다면 12는 '위(緯)'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역으로 설명하자면 주역은 64괘로 되어 있지만 도전괘와 부도전괘로

합하면 36괘가 되며 상하경으로 각각 18괘씩 이루어졌는데

괘당 육효씩이므로 상경 108효 하경 108효를 이루고 있다.

생각건대 108이란 수의 의미는 예를 들면 일년이 365일로 이루어진 것처럼

108의 수도 마디로 고리를 이루는 법수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하나(一)가 신묘하게 펼쳐져 만 갈래로 가고 만 갈래로 오니,

그 쓰임(用 : 변화작용)은 변하지만 근본(一 : 본체원리)은 움직이지 않는다.


태극에 해당하는 본체 一이 무궁무진한 조화작용을 행하니 만왕만래이다.

"散之在理則有萬殊하고 統之在道則無二致라" 흩어서 이치에 두면

만가지로 다름이 있고 거느려 도에 두면 두 가지로 다다름이 없으니(一致),

그 작용은 무한히 변화하지만 그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주역에도 "천지의 도는 바르게 보는 것이요 일월의 도는 바르게 밝히는 것이요 천하의 동함은 무릇 하나에 바루어짐이라(天地之道는 貞觀者也ㅣ오

日月之道는 貞明者也ㅣ오 天下之動은 貞夫一者也ㅣ라)"고 하였다.

또한 근본 중심은 부동(不動)이다. 수를 헤아림에 있어서도

중심에 해당하는 것은 수를 말하지 않으니,

이를 '虛一無爲 皇極不語數'라고 한다.

즉 하늘의 별자리를 셀 적에 북극성을 뺀 채 28宿라 하고,

바둑판의 361점 가운데 1점을 뺀 나머지 360점을 주천상수(周天常數)로 보며, 괘효를 뽑는 시초의 50책수(大衍數)에서 1책을 뺀 나머지 49로써 용책을 삼는 것이다.


本心本 太陽昻明

본심(본래의 마음)이 근본(一)이니, 태양과 같이 빛나고 밝다


사람의 마음은 만왕만래로 용변(用變)하여 육욕칠정이 있지만

그 본래의 진성(眞性) 즉 본심은 부동(不動)의 본(本)인 것이다.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한 것이 성품이 되니 그 근본인 마음의 실체는

밝은 하늘의 태양과 같이 찬란하고 광명한 것이다.

소강절 선생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사람은 천지 가운데에 있고

마음은 사람 가운데에 있다(人居天地之中하고 心居人之中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마음이 태극이다(心爲太極)"라고 하였는데, 태극은 일(一)로서

마음 또한 일(一)의 의미가 되니 마음은 곧 만사만물의 본원이 되는 것이다.

一은 마음의 본체요 九는 마음의 극(極)한 용수(用數)이다. 태양(太陽)의

밝은 신명(神明)이 마음 속에 거주하고 하늘의 태양처럼 사방을

비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사상(四象)에서 태양의 수는 九가 되므로

마음을 '태양(9)앙명'으로 비유한 것이다.

마음이란 결국 하늘에서 비롯된 것임과 하늘 닮은 것임을 표현한 것이며,

마음 구수(九數)를 다한 구구팔십일(九九八十一)자로써

천부경을 지은 뜻은 천부경 81자 모두가 심법 밖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一)로 되니
(혹은 '사람은 천지 가운데 하나라')


천지는 본체로서 항상하지만 사람을 용수(用數)로 삼아 도를 이룬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천지만물과 더불어 일체를 삼을 수만 있다며

그는 천지와 더불어 함께 자리잡으며 만물을 화육할 수 있다 하니

이른바 『중용』에서 말하는 "致中和면 天地ㅣ 位焉하며

萬物이 育焉하니라"한 뜻이 이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능히 그 성품을 다하면 人의 성품을 다하는 것이고,

人의 성품을 다하면 곧 物의 성품을 다하게 되어서,

사람이 천지와 더불어 삼재일합을 이루는 것이다.


一終无終一

하나(一)로 끝마치나 무로 마치는 하나(一)이다
(혹은 '일의 종은 무니 하나를 마침이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술했듯이 도(道)는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가에서는 '일관(一貫)'을

말하고, 불가에서는 '귀일(歸一)'을 말하며,

도가에서는 '수일(守一)을 말할 뿐이니 옛 분들은 무욕(無慾)으로써

정정(定靜)을 주장하며 하나를 기르려 힘썼던 것이다.

『중용』에 "誠은 物의 終始가 되므로 誠이 없으면 物이 없다"고 하였다.

誠은 주역의 이른바 成言乎艮을 이르니,

만물의 終과 始가 艮보다 성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대학』에도 한결같이 至善에 그치는 至於至善을 삼강령의 마지막에

놓음으로써 大學之道 즉 학문하는 도의 최종 목표가 이 一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부경의 수신용법(修身用法)이 바로 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 家苑.이윤숙 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