舍廊房(사랑방)

浮雪居士(부설거사)

華谷.千里香 2012. 3. 2. 10:58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월명암에

소장된 부설전(浮雪傳)이 유일한 한문 필사본이다.

 
부설거사는 신라 진덕여왕때의 이름높은 고승이다.

이웃 김제의 만경에서 태어난 부설의 속명은

진광세인데 어려서 출가하여 변산의 가장

깊고 높은곳의 월명암에서 영조 영희와 함께 수도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영조 영희와 상의하여 더 크고 깊은 오대산에 들어가 도를 닦기로 하고

길을 떠나가는데 고향인 만경에 못 미처 두능이라는 데를 지나다 구씨라는

집에서 하루밤을 쉬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구씨(具氏) 집에는 묘화(妙花)라는 벙어리 딸이 하나 있었는데

부처님 곁에 피어 있는 연꽃 한송이를 꺾은 죄로 벙어리가 되어

이승으로 추방된 절세의 미인이었다.
세 사람의 수도승 중 부설에게 첫눈에 반하여 깊은 연정을 품게 되었다.

일행이 떠나려 하자 묘화가 염치불구하고 결혼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수도의 길을 떠나는 부설인지라 들어 줄 리 없었다.

“그대의 마음 고맙긴 하나 나는 오대산으로 수도의 길을 떠나는 사람

어찌 한 여자의 작은 소망을 위하여 장부의 큰 뜻을 꺾으리오.”

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묘화가 하는 말이“중생을 구제하려 한다면서 어찌 이 소녀의 소박한

소망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내가 죽게 된다면 장차 큰 뜻을 편다하여

무슨 뜻이 있으리오.”하면서 죽기로써 결혼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뒷날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앞서 우선 나부터 구제하여 달라는 묘화의 끈질긴

요구에 감동한 부설은 자기의 뜻을 굽히어 묘화와 결혼하기로 하고

두 친구 영조와 영희는 오대산으로 떠났다.

부설은 묘화와 결혼하여 아들 딸 남매를 낳고 살면서 쉬지 않고

아내 묘화와 더불어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의 하늘에 언제나 하얀 눈이 떠돌아 다녔다 하여

두능마을을 부설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뒷날 부설거사의 아호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아들 딸 낳고 끊임없는 수도에 힘쓰고 살아가는데

하루는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갔던 두 친구가 찾아왔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설을 보고 두 친구가 하는 말이

“우리는 오대산에 들어가 공부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 오는 길이네만

그대는 여자에게 빠져 낙오자가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아깝고 가엾은 일이네”. 하고

비웃음 반 위로 반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묘화부인이 옆에서 듣다가

“그렇다면 내 남편과 당신들이 누가 더 공부를 잘 하였는지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합시다”하여 서로 합의가 되었다.

그리하여 병 세개에다 물을 가득히 담아 벽에 걸어 놓고 그들에게

방망이로 병을 쳐보라 하니 병이 깨어지면서 물이 방바닥에 쏟아 졌다.

부설이 방망이로 병을 치니 병만 깨어져 방바닥에 떨어지고

병모양의 물은 그대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이를 본 두 친구는 자신들의 공부가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부설내외는 그길로 두 남매를 데리고 지난날 공부하던 변산의 월명암

근처에다 부설암을 이룩하고 낙조대 근처에다 묘화부인을 위하여

묘적암을 세웠으며 그 딸 월명각씨를 위하여

지금의 월명암자리에 월명암을

그리고 그 아들 등운은 월명암 뒷터에 등운사를

각각 세우고 한평생 불도를 닦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