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廟 配享(문묘배향)
문묘(文廟)는 공자 이래 2000여년 유학(儒學)을 발전시켜 온 중국 및
우리나라 대학자들의 위패(位牌)를 대성전(大成殿)에 봉안(奉安)하여
제향(祭享)하는 곳으로 우리 나라 문묘는 현재 서울 명륜동 3가에 소재한다.
우리 나라 문묘 제도는 중앙에 성균관이 있고, 각 고을에 향교가 있으며,
‘대성전’에서는 공자 이하 고대 중국 이래의 성(聖) ․현(賢) 제위(諸位)와
우리나라 ‘18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한다.
중앙 성균관에서는 5성(五聖),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중국 역대제현(歷代諸賢) 94위및 동국18賢 도합 133위를 봉향(奉享)한다.
四聖(사성)
孔子,석가,예수,소크라테스
十哲(십철):공자의 열사람의 제자
顔回(안회):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현인.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였다.
은군자적인 성격으로 “자기를 누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듣지도 말고,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켰다.
閔子騫(민자건):중국 노나라때의 현인,이름은 손이며
자건은 자이다.효자로 유명하다.
冉伯牛(염백우):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이름은 경(耕).백우는 자.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덕행의 선비로 알려졌다.
仲弓(중궁):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유학자,자는 중궁이다.
宰我(재아):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유학자(?~?).
본명은 재여(再予).자는 자아(子我).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언어에 뛰어났다.
제나라의 임묘대부(臨苗大夫)가 되었다.
子貢(자공):중국 춘추시대 위나라의 유학자(?B.C.520~?B.C.456).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으로 언어에 뛰어났으며,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宰相)을 지냈다.
冉有(염유):중국 춘추시대의노 나라사람(?~?).자는 자유(子有).
염유(冉有)라고도 한다.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정사(政事)에 뛰어났다.
子路(자로):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유학자(B.C.543~B.C.480).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로는 자.공자의 제자로 십철(十哲)의 한사람으로
정사(政事)에 뛰어났으며 공자를 제일 잘 섬겼다고 한다.
子游(자유):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유학자(B.C.506~?B.C.445).
본명은 언언(言偃).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사람으로,자하(子夏)와
더불어 문학에 뛰어났고 예(禮)의 사상이 투철하였다.
子夏(자하):중국 춘추시대의유학자(B.C.507~?B.C.420).본명은 복상(卜商).
공자의 제자로서 십철(十哲)의 한사람이다.
위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으로 시와 예(禮)에 능통하였는데,
특히 예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였다.
六賢(육현)
염계선생(濂溪先生) 주돈이(周敦頤), 명도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
이천선생(伊川先生) 정이(程頤), 회암선생(晦庵先生) 주희(朱熹),
강절선생(康節先生) 소옹(邵雍), 횡거선생(張橫渠先生) 장재(張載) 이다.
濂溪先生(염계선생) 周敦頤(주돈이)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세계는 태극->음양->오행->남녀->만물의 순서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또,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같다고 하였다.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주(道州:湖南省 道營縣)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태극(太極:無極)으로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도해(圖解)하여‘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태극→음양(陰陽)의
이기(二氣)→오행(五行:金·木·水·火·土의 五元素)→남녀→만물의
순서로 세계가구성되었다고 논하고, 인간만이 가장 우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정(中正)인의(仁義)의 도를 지키고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성인(聖人)이 되어야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의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본래 하나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저서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통서(通書)가 있으며,수필 애련설(愛蓮說)에는
그의 고아한 인품이 표현되었다.
남송의 주자(朱子)는 염계가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를
가르쳤기 때문에 도학(道學:宋代의 新儒敎)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明道先生(명도선생) 程顥(정호),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존칭으로 명도선생이라 불리고,동생 정이(程頤:伊川)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程珦)이 남안(南安:江西省 大庾縣)의 판관이었을때
주돈이(周敦頤:濂溪)를 한번 보고 아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
26세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陝西省] 후셴현[鄠縣]의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澤州:山西省) 진청현[晉城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
伊川先生(이천선생) 程頤(정이),
자 정숙(正叔). 호 이천(伊川). 시호 정공(正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이천백(伊川伯)에 봉하여졌으므로 이천 선생이라 존칭된다.
형 정호(程顥:程明道)와 함께 주돈이(周敦頤:周濂溪)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철종(哲宗) 초에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 등의 추천으로
국자감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비서성 교서랑(校書郞)·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당화(黨禍)를
입어쓰촨성[四川省] 푸저우[헴州]로 귀양간 일도 있다.
학자로서의 그는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가 특히 깊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상은“지미(至微:隱)한것은 이(理:本體)요. 지저(至著:顯)한 것은
상(象:氣用)이라 하여 일단 양자를 구별하고, 체(體)와 용(用)은
근원이 같으며 현(顯)과 미(微)에 사이가 없다”고
상관관계를 설명한 점에 특색이 있다.
그의 철학은 주자(朱子)에게 계승되어,태극도설(太極圖說)과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나타나 있다.
학문의 방법도 형은 오직 정좌(靜座)를 주장하였으나,그는‘경(敬)을
중히여겨‘거경궁리(居敬窮理)에 힘썼다.
이와 같은 일도 주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송대(宋代)의 신유학인
정주학의 주축이 되었다.
저서에 역전(易傳) 4권이 있으며, 그의 학설은 형의 학설과 함께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되었다.
또 그의 전기는 주자가 지은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 실려 있다.
晦庵先生(회암선생) 朱熹(주희),
주희(朱熹, 1130~1200)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성(姓)은 주(朱), 휘(諱)는 희(熹)이며,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그리고,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이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공자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정호·정이등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가 불,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康節先生(강절선생) 邵雍(소옹),
호 안락선생(安樂先生). 자 요부(堯夫).시호 강절(康節).소강절(邵康節)이라
불릴 때도 많다.
허난[河南]에서 살았으며, 주염계(周濂溪)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천문(天文).역수(易數)를 배워 인종(仁宗)의
가우연간(嘉祐年間:1056∼1063)에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사마광(司馬光)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주염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역(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그는 음(陰)·양(陽)·강(剛)·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W.F.라이프니츠의 2치논리(二値論理)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2편에서 허심(虛心),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詩體)의 시집(詩集)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20권)의
작품이 있고,어초문답(漁樵問答) (1권)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橫渠先生(횡거선생) 張載(장재)
장재(張載: 1020~1077)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자후(子厚)이다.
봉상미현의 횡거진(橫渠鎭) 출신이었기 때문에 횡거선생(橫渠先生)이라고
호칭된다.
존칭하여 장자(張子)라고 불린다. 어렸을 때에 현의 지사직(知事職)으로 있던
부친을 잃었다.
젊었을 때 범중엄을 회견하고 병사(兵事)에 대해 말하였다.
그때 범중엄은 "유자(儒者)에게는 자연히 명교(名敎: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를 즐길 만한 것이 있다.
어찌하여 병담(兵談) 같은 것을 좋아하는가"라고 하면서 중용(中庸)을
그에게 주었다.
횡거는 거기서 비로소 도(道)를 구할 것을 결심하고 한때 불교·노장사상에
들어갔으나 오래지 않아 6경(六經)의 학문으로 돌아왔다.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에 지방관으로서 여러 가지 공적을 쌓았다.
그때의 황제인 북송의 신종은 그를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당시의
집정(執政: 내각의 최고 책임자)이었던 왕안석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신병을 이유로 향리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을 다하였다.
五聖(오성)
孔子(공자: 551-479 B.C)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사상가.학자.정치가.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유교의 개조(開祖)로 5성의 으뜸.
당(唐)나라 현종(玄宗)때 문선왕(文宣王)이란 시호가 추존되고
지성(至聖)으로서 공자묘(孔子廟:문묘)에 모셔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불리워진다.
顔子(안자: 521-490 B.C)
'안자'는 안회(顔回 :자는 연(淵)으로 일명 안연(顔淵)이라고도 함)의 존칭이다.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수제자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으나
32세로 요절(夭折)하자 공자가 매우 슬퍼했다.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존숭(尊崇)되었고 후세에 연국복성공(國復聖公)이란
존호(尊號:封號)를 받아 문묘에 배향되었다.
曾子(증자: 505-436 B.C)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의 유학자인 증삼(曾參)을 높임말.
자는 자여(子輿). 공자의 제자로 효행으로 이름나 효도를 역설하여
공자의 의견으로「孝經」을 지었다.
大學을 저술하여 공자의 인의(仁義)의 도를 알리고, 덕행과 학술을
조술(祖述)하여 이를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중용의 저자로 알려짐)
에게 전했으니 곧 자사의 스승이다.
이 외에도 저서에 曾子가 있다. 후세 원(元)의 문종(文宗)이
그를 봉(封)하여 성국종성공(國宗聖公)이라 하였다.
子思(자사:492-432 B.C)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급(伋).
공자의 손자로 증자의 제자이다.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전하고 천지(天地)의 이법(理法)을 설명,
윤리의 기준을 밝혔고, 성(誠)을 천지 자연의 법칙이라 하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을 세웠다.
저서에子思子가 있는데 그 중의 일부가 中庸이다.
후세에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이란 봉호(封號)를 받았다.
孟子(맹자:372-289 B.C)
중국 전국시대 추(鄒)나라의 사상가. 유학자.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제자에게 배웠다고 함.
여러 나라를 편력하면서 제후에게 왕도(王道)를 개진(開陳)했다.
공자의 '인(仁)'사상을 발전시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고, 정치설에 있어서는
공자가 존주론(尊周論)을 주장한데 대하여 그는 민권주의(民權主義)로
발전하여 최초로 혁명론(革命論)을 제창했다.
이로 인해 그의 저서 맹자가 후세 오랫동안 금서(禁書)목록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 성선설에 입각하여 왕도론(王道論), 교화론(敎化論)을 주장하는 한편,
주(周)의 문왕(文王)을 이상으로 하여 정전법(井田法)의 실시를 주장했다.
그의 학설은 여러 제후의 공명(共鳴)을 얻지 못했으나 공자의
인의설(仁義說)을 확장하고, 유학의 이론적 기반을 수립하여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언행을 기록한 책 孟子는 사서(四書)의 하나이다.
후세에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이란 존호(尊號)가 붙여졌다.
宋朝二賢(송조이현)
중국 송(宋)나라는 시대적으로 크게 북송(北宋: 960∼1126)과
남송(南宋 :1127-1279)으로 나뉘는데,
여기서의 2현(정호·주희)중 정호(程顥)는 북송인이고, 주희(朱熹)는 남송인이다.
송학(宋學)은 태극도설(太極圖說)과.통서(通書)의 저자인 북송의
주돈이(周敦頤:1017-1073. 호 염계(濂溪), 道國公)를 시조로 하고,
그의 학문은 정호[程顥 :1032-1085, 호는 명도(明道), 豫國公]·
정이[程 頤:1033-1107, 호는 이천(伊川), 洛國公] 형제로 이어져
성리학(性理學)의 기초가 닦여졌고, 다시 남송의 주자(주희)에 의하여
주자학(朱子學)으로 대성되었는데, 이를 아울러 정주학(程朱學)이라 하였다.
이 성리학은 송학(宋學), 도학(道學) 또는 이학(理學)이라고도 하였다.
위의 4현(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을 송조 4현이라 하여 종래
수원향교에서도 배향하였으나 지금은 백정자(伯程子)인 정호와
주자(주희)의 2현만 배향하고 있다.
程顥(정호):1032-1085
중국 북송의 유학자,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
아우 정이(程 頤:호 이천(伊川))와 함께 주돈이(周敦頤:호 염계(濂溪))에게
송학(宋學 :성리학)을 배워 기초를 닦아 남송의 주희로 하여금
그 학문(정주학, 주자학)을 집대성하게 했다.
아우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불려지며 특히 그를 백정자(伯程子),
아우(정이)를 숙정자(叔程子)로 구분되어 불려지기도 한다.
저서에 아우와의 공저「이정전서(二程全書)」등이 있다.
후일 그를 예국공(豫國公), 아우 이를 낙국공(洛國公)이란
봉호(封號)가 각각 붙여졌다.
朱子(주자: 1130-1200)
중국 남송의 대유학자 주희(朱熹)를 높이어 일컫는 말·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 또는 자양(紫陽)·
그의 학문은 북송의 주염계(周濂溪 : 敦)·정명도(程明道:顥)·정이천(程伊川)·
나예장(羅豫章)·이연평(李延平) 등의 학(學)과 도(道),
그리고 불학(佛學)을 집대성한 것으로, 우주에는 이(理)와 기(氣)의
이원(二元)이 있다고 하고, 그 실천 강목으로 거경(居敬)·
궁리(窮理)의 이대강(二大綱)을 들었다.
그의 학문을 주자학(朱子學)이라 하며, 후세 사람들이 주자(朱子)라
존칭하고 휘국공(徽國公)이라 존칭하였다.
저서에 주자문집(朱子文集).근사록(近思錄).주자어류(朱子語類).
사서집주(四書集註).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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