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들을 나타내는 선(仙)이라는 글자는 사람이라는 '人'자와
언덕이라 는 '山'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글자는 신이 되어 인간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과
언덕에서 지내는 탁월한 부류의 인간을 나타내고 있는데,
신선은 기분이 내킬 때는 눈에 띄었다가 또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 죽은 자를 일으키고,돌 같은 것들도 만지기만 하면
금으로 변하게 한다든가, 자유 자재로 갖가지 놀라운 연금술적
변성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중 팔선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살면서 자연의 비밀을
연구하다가 불로 불사하게 되었다고 하는 도교의 전설적인
존재들입니다.
팔선은 불교의 18나한과 일맥 상통하는데 불가에서 나한들은 각기
저 들을 표상하는 문장들에 의해 구별되고 있습니다.
팔선과 나한(羅漢)은 저들을 상징하는 부속물 위에 서거나 앉아서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인생에 있어 각기 다른 상태,
즉 가난,부유,귀족,평민,성년,청년,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표상합니다.
청나라때의 저명한 학자 조익(趙翼,1727~1814 )이 쓴
해여총고(陔餘叢考) 에 따르면
"불로 불사하는 존재들의 분명한 집합체를 구성하는 위의 인물들에
관한 전설은 원나라 시대 그 이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중의 몇몇은 그 이전부터 도가
전설에서 신선으로서 이름 나 있었다."
문헌마다 팔선의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여동빈을 필두로 그의 스승인 종리권(鍾離權),이철괴(李鐵拐),
남채화(藍采和),장과로(張果老),한상자(韓湘子), 조국구(曹國舅),
하선고(何仙姑)가 일반적 입니다.
팔선은 일반 민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신선이기 도 합니다.
이중 하선고만 유일하게 여성이다(남채화를 여성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여덟명의 신선은 서쪽을 주관하는 서왕모가 여는 반도회(蟠桃會)에
자유롭게 참석하며,이들은 실제로는 별로 친분이 없지만 흔히 한데
모여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수의 신이며 이들의 불로불사를 보장 해주는
남극노인성 수성(壽星)에게 선물을 바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팔선들은 중국의 신이기도 하지만 신적 경지에 든 인간이란 입장에서
가장 친근감 있는 신들 입니다.
△鍾離權(종리권)
-종리권(鍾離權)-
팔선 중 수장격인 종리권(鍾離權)에서 성은 종리(鍾離)이고,
이름이 권(權)이며 자(字)는 운방(雲房)입니다
기원전 1122-249년, 주나라 때 살았고 불로 장생 선약의 비밀과
연금술에서의 변성하는 분가루를 얻었다고 합니다.
흔히 신선 여동빈의 스승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으며
보통 민간에서는 '한나라때 사람 종리'라는 의미로
한종리(漢鍾離)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경조 함양(지금의 협서) 출신으로 후에 이름을 각(覺)으로 고쳐
종리각(鍾離覺)으로 바꾸었으며 자(字)도 적도(寂道)라 하였고
도호(道號)를 정양자(正陽子)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태어날때 부터 걸어 다녔다고 하며,성장하여 간의(諫議)라는 관직까지 얻고
진(晉)의 장군으로 복직했으나 토번과의 전쟁중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을뻔 하고
도주 하던중 숲에서 동화제군(東華帝君-도교의 신중 하나)를 만나 신선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동화제군은 종리권에게 장생진결(長生眞訣), 금단비결(金丹秘訣),
청룡검법(靑龍劍法)등을 일일이 전수하였고 종리권은 깨달음을
얻을수 있었습니다.
종리권은 천계로 가기전에 제자인 여동빈에게 붓을 들어 석벽 위에 초서로
다음과 같이 썼는데.
"주일고명(晝日高明) 야월원청(夜月圓淸)
음양혼신(陰陽魂神) 혼합상승(混合上昇)".
-인체 가운데 혼(魂)은 陽에 속하고 백(魄)은 陰에 속한다.
인간이 양기를 보전하여 魂을 잘 응결시키자면 양혼(陽魂)을
음백(陰魄)과 결합해야만 음양이 능히 서로 합하게 되고,
혼백(魂魄)이 참(眞)을 이루고, 수련하여 진인(眞人)으로 된다.
이 글은 신선도를 익히는 사람들에겐 필수적인 깨달음을
제시해 주었다고 합니다.
민간 신앙에선 그는 보통 배를 드러내 놓고 있는 뚱뚱보나,
손에 복숭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상당히 유쾌한 성격으로 그려 집니다..
종리권은 부채로 죽은 자의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 부채는 한 과부에게 얻은 것으로 그녀가 죽은 남편의 약속 때문에
재혼을 못하자 종리권이 과부가 들고 있던 부채로 죽은 남편을
부활 시켜 그녀의 재가를 허락 받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요정 신화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젊고 아리따운 여인과 결혼
하여 철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낙향하였다고 합니다.
△張果老(장노과)
-장과로(張果老)-
서기 7-8세기경의 은자로 자신을 눈에 띄지 않게 할수 있는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주술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과로는 늘 종이로 만든 한 마리 하얀색 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하루에 만리를 갔다고 합니다.
나귀를 타지 않을 때는 곧 나귀를 접어서 보관했는데 그 건장한 나귀가
순식간에 얇은 비단 종이로 변했고 나귀로 변한 비단종이는 접으면
조그마한 종이 한 꾸러미가 되었으며,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고 한다.
나중 나귀가 필요할 때 종이뭉치를 꺼내어 입에 맑은 물 한입을 물고
그 위에 뿜으면 곧 한 마리 키가 크고 건장한 하얀 나귀로 변하였다고 하며.
나귀를 타고 하루에 만리,중국천하를 주유하고 다녔다 합니다..
또 특이하게 나귀를 뒤로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장과로(張果老)의 원래 이름은 장과(張果)로 존칭으로 노(老)자를 뒤에
붙여 장과로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일찍이 도를 닦아 오랫동안 항주(恒州)의 중조산(中條山)에서
은거하였는데 주로 지금의 산서(山西)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고 합니다.
당태종.고종이 황제로 있을 때 조정에서도 이미 장과로가 장생불로의
비술을 터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차례 황제의 조서를 내려
불렀으나 장과로는 사양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측천무후가 황제에 즉위한 후 반드시 장과로를 불러오도록 명령했고,
황제의 사자들이 역참의 말을 갈아타고 서둘러 항주에 도착하니 장과로는
사자들이 도착하기 하루 전날 중조산의 투녀묘(妬女廟) 앞에서 자결 했습니다.
황제의 사자들이 확인하니 장과로의 시체는 이미 부패하여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시체가 진물러 구더기가 시체를 타고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사자들이 장안으로 돌아와 측천무후에게 전말을 보고하자 장과로가
이미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를 더는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은 항주의 숲 속에서 태연하게
바둑을 두고 있는 장과로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장과로가 거짓 죽음으로 황제의 부름을
피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후 당 현종이 개원23년(735년) 통신사인 배오를 항주에 파견해서
장과로를 낙양으로 모셔오게 하였습니다.
장과로와 배오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돌연 장과로가 피를
토하며 죽었습니다.
배오는 측천무후 때 장과로가 죽음을 가장해서 조정의 부름을 피했다는
옛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과로의 시체 앞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하면서 황제의 정성스럽게 갈구하는 구도의 마음을 설명했습니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장과로는 점차 깨어나더니 다시 살아났으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배오는 감히 다시 낙양으로 가자고 권할 수 없어서 역마를 타고
낙양으로 되돌아 와 그간의 사정을 현종에게 아뢰었습니다.
현종은 상세한 전후 사정을 듣고, 잠시 깊이 생각하다가
다시 중서사인 서교에게 명령해 황제의 옥쇄가 찍힌
정식 조서를 가지고 항주에 가서 장과로를 모셔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자 장과로는 마침내 황제의 성의에 감동받아
사자인 서교를 따라 낙양으로 왔습니다.
이때가 현종이 ‘개원의 치(개원23년,735년)를 펴던
시절로 바야흐로 태평성세였습니다.
현종과 장고로는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담소를 나누었는데
현종은 장과로의 하얀 머리털과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을 보면서
“선생은 득도한 도인이라고들 합니다.
어찌하여 머리털과 이빨이 이리도 노쇠했습니까?” 물었습니다.
장과로는 문득 현종의 이 질문이 장과로 자신을 의심한다는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산에 사는 신은 이미 쇠로의 나이에 들었고,
몸에는 의지할 만한 도술이 없습니다.
머리털이 하얗고 이빨이 흔들리는 것이 폐하를 혐오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하니 사람을 혐오스럽게 만드는 이 이빨과 머리털은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라며 현종의 면전에서 손을 들어 얼마 남지 않은 희끗희끗한 머리털을
깨끗이 뽑아버리고,또 입안에 남아있는 치아를 전부 뽑아 버리자
입안이 피로 가득하였습니다.
현종은 설마 장과로가 면전에서 이러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선생은 어찌 이렇게 잔악하십니까?
우선 좀 쉬다가 잠시 후 다시 봅시다.” 하고는 자리를 떴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현종은 장과로를 다시 청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았을 현종은 깜짝 놀랐습니다.
장과로의 머리에는 새까만 머리가 이미 길게 자라있었고,
입안에는 새하얀 이빨이 새로 나 있었습니다.
마치 나이가 30대 정도로 젊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현종은 장과로가 보통 사람과 확실히 다르다고 인정하면서
이로부터 더욱 존경하였고, 시간만 나면 장과로를 입궁케 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하루, 태상시 소화, 비서감 왕형질이 함께 장과로를 방문하였습니다.
장과로와 이들이 한담하고 있는데 돌연 장과로가 크게 웃으면서 얘기하기를
“공주를 처로 둔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야!”
장과로의 말을 들은 소화ㆍ왕형질 두 사람은 서로 놀라면서 장과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때 태감이 찾아왔습니다.
장과로에게 “현종황제께서 옥진(玉眞) 공주가 어려서부터 도교를 독실하게
믿으니 옥진 공주를 선생님께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선생님의 뜻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장과로는 큰소리로 웃고는 “나는 이미 나이가
대단히 많은 고령자이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부할 수 없으며,
공주의 청춘을 그르칠 수 없다.”면서 사양하였습니다.
심부름 온 태감은 궁으로 돌아가 현종에게 그대로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현종은 공주를 장과로에게 시집보내기로 혼자 마음먹었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상태 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소화ㆍ왕형질은 이때서야 비로소 장과로의
“공주를 처로 둔다면 가히 두렵다.”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 늙은이야말로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귀신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후에도 현종은 장과로에게 독주를 먹이거나 여러 실험을 했지만
장과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며 현종은 그를 경외하면서도
그의 정체가 궁금 했습니다.
현종은 정통한 법술을 갖춘 엽법선(葉法善)을 청하여 물었습니다.
“그대는 장과로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고 있는가?”.
엽법선은 “신이 알기는 아오나 만약 장과로의 내력을 말한다면 그 말을
끝내자마자 곧 죽게 됩니다. 그래서 감히 입을 열 수 없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제가 죽은 후 황제의 모자를 벗고 맨발로 장과로에게 가서
살려달라고 하신다면 저는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현종은 그러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엽법선은“장과로는 천지가 처음 나누어질 때 태어난 흰 박쥐의 정령입니다!”
라며 말을 했는데 말을 끝내자마자 과연 엽법선은 일곱 군데에서 피를 흘리며,
땅에 고꾸라져 죽었습니다.
현종은 곧바로 황제의 모자를 벗고 맨발로 장과로의 처소로 찾아가서
사죄하면서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니 엽법선을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장과로가 천천히 일어나면서“이 어린아이는 뽐내면서 천기를 누설하였습니다.
만약 엄하게 벌하지 않으면 큰 일을 망칠까 두렵습니다.”
라며 거절 했으나 현종이 여러차례 간곡하게 청하자
장과로는 맑은 물을 한 입 물고 엽법선의 얼굴에 뿜었고,
그때서야 엽법선은 정신을 차리고 살아났습니다.
이후 천보(天寶) 초(742년)에 장과로는 향주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제자가 장과로의 장례를 중조산에서 치르고,
현종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현종은 믿을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장과로의 무덤을 파게 했는데,
관은 비어있었습니다.
현종은 장과로 무덤자리에 ‘서하관’(棲霞觀)이란 도관을 세우고
장과로에게 제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장과로가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그림 위에
다음과 같이 詩를 썼습니다.
擧出多少人 (거출다소인) 많은 사람을 들어 보아도
無如這老漢 (무여저노한) 이 늙은이 같은 이 없네.
不是倒騎驢 (불시도기려) 나귀를 거꾸로 탄 게 아니라
萬事回頭看 (만사회두간) 모든 일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네.
그의 상징은 어고(魚鼓)로서 그것은 두들기는 두 개의 막대기가
달린 대나무 통이나 장고 형태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악기입니다.
현종이 그를 자기 궁정에 데리고 있으려고 했으나 장과로는
방랑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재차 궁정에 들라는 명을 받자 자취를
감추어 육체가 멸한 고통을 받지 않는 신선계로 들어 갔다고 합니다.
△呂東賓(여동빈)
-여동빈(呂東賓)-
서기 750년경의 학자이자 은자인 그는 팔선의 수장격인 종리권으로부
터 도교의 비밀을 배우고, 나이 50에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발사의 수호 성자이며, 특히 병자들의 숭앙을 받았습니다..
여동빈은 팔선 중에서 전해오는 일화와 사적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개가 여동빈을 보고 짖다니,
좋은 사람을 몰라본다”(狗咬呂洞濱,不識好人心)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여동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여동빈 성명 석자는 세간을 두루 돌면서 중생을 구도한 신선의
대표적 명칭이 되었습니다.
여동빈의 본명은 경(?)이고, 자(字)는 백옥(伯玉)이며
또 다른 이름은 소선(紹先)로 출가 이후에는 이름을 암(岩)으로 고쳤고,
자는 동빈(洞賓)입니다.
그는 당나라 후대,관서 하중부 낙현사람으로,현재 지명은 산서성
영락현이며,그곳에 그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만수궁(萬壽宮)을 세웠습니다.
그는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 12년(797년) 4월 14일에 출생했다고 하며.
그의 모친이 여동빈을 낳을 때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며 한 마리 선학(仙鶴)이 하늘에서 날아 내려와 침상으로
날아들다가 돌연 사라졌다고 합니다.
여동빈은 어린 시절에 총명이 남달라 하루에 글자 만자를 암송하고
말이 입에서 나오면 문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장한 후 신장은 8척 2촌에 목덜미는 기다랗고 이마는 넓었으며,
봉(황)의 눈과 광채가 나는 눈썹에 행동거지는 당당 했습니다.
성격은 소박하였으나 말주변이 없었으며, 언사가 능숙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성년이 되어 김씨를 아내로 맞아 자녀 넷을 두었습니다.
당나라 무종(회창) 연간에 여동빈은 두 차례나 장안에 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 번 다 낙방하였다고 합니다.
여동빈이 두 번째로 장안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6세였습니다.
과거에 낙방하고 낙심한 가슴속에 쌓인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
발길이 가는대로 걷다가 어느 작은 술집에 들어가
자작하면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술집으로 긴 수염에 빼어난 눈썹, 안색이 붉으레하게 빛나는
도사복장을 한 노인이 걸어 들어와 여동빈의 맞은 편 빈자리에 앉았습니다.
세간의 다툼이 없는듯 사리사욕이 없고, 온화함이 넘치는 듯한
그 노인의 풍모는 여동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두 사람은 마주하여
술잔을 권하면서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술잔을 돌리면서 서로의 심사를 한마디씩 토로한 후, 풍채 좋은 노인은
돌연 시심이 크게 일어난 듯 술집 종업원을 불러 붓과 먹을 가져오게 하였고.
노인은 즉석에서 시를 읊으면서 붓을 들어 술집 벽 위에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습니다.
坐臥常携酒一壺(좌와상휴주일호)
不敎雙眼識皇都(불교쌍안식황도)
乾坤許大無名姓(건곤허대무명성)
疏散人間一丈夫(소산인간일장부)
앉으나 누우나 언제나 한 호로의 술을 가지고 다녔고
두 눈으로는 황도(세상일)의 일을 모르도록 했다네
하늘과 땅은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이
한낱 인간세상을 떠도는 한 사내일 뿐일세.
여동빈은 시를 음미해 보고는 노인의 시풍이 표일하고 호방함을
깊이 찬탄하고는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절을 하고난 후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다고 하였지만,
후배인 저로서는 도장께서도 칭호가 있을 것 같아 묻자옵니다.
도장의 성명 삼자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노인은 두 눈에 미소를 띠면서 “나의 성은 종리(鍾離)이고
이름은 권(權)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종리 노인이 술잔을 들며 “자, 우리 술 한 잔 합시다.”하면서 술을 권했고
술을 마신후 종리 노인은 “자네도 시 한수 짓는 게 어떠한가?”하였습니다.
여동빈도 술 한 잔을 마시자 시심이 샘솟듯 올라와 붓을 들고
술집 벽 위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습니다.
生在儒家遇太平 (생재유가우태평)
懸纓垂帶布衣輕 (현영수대포의경)
誰能世上爭名利 (수능세상쟁명리)
欲侍玉皇歸上淸 (욕시옥황귀상청)
유가 집안에 태어나 태평시대를 만났건만
갓 끈을 걸어두고 허리띠를 벗어 놓았으니
삼베옷이 가볍다(벼슬하지 않은 포의를 비유)
누가 세상과 더불어 명예와 이익을 다투겠는가?
옥황상제를 모시러 상청경으로 되돌아 갈까 한다.
이후 여동빈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종리권의 제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종리권은 여동빈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 여동빈에게 "천부적인 너의 좋은
자질을 보건대 세상을 제도하는 선(仙)술을 닦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욕칠정에 물들은 인간의 마음을 제거하기가 어려워 신선이 되기는
어렵다.너의 공행(功行)을 다 채우지 않아서 설사 신선이 되는 신선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실제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쇠를 금으로 만들고, 납을 은으로 만드는
황백술(黃白術-연금술)을 전수 하겠다.
너는 이 황백술로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라.
삼천가지 공덕이 차고 팔백가지 선행을 마치고 나면 내가 다시 와서,
그때,너를 제도하겠다.너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습니다
여동빈이 좋다고 하자 종리권은 순간적으로 공간이동을 하여 종남(終南)산
학정(鶴頂)봉 위의 동굴 밖에 도착했습니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큰 반석 위에 마주앉아 원화주(元和酒)를
석잔 마시고 있는데, 비취빛 저고리에 붉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구름을 밟고
기이한 향기를 풍기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선인 종리권에게 봉래산 천지회
모임에 같이 가자고 초대했으며,
종리권은 수련서인 현결(玄訣)을 남겨놓고, 자주색 구름을 타고
하늘 저 멀리로 사라졌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종리권이 동굴로 되돌아 왔을 때 여동빈은 스승이 남겨놓고
간 현결(玄訣)을 숙독해서 경지가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여동빈은 종리권에게 여러 술법을 배워 신선의 반열에 이르었 습니다.
그는 스승과 헤어진후 사람들을 잡아먹는 요괴들을 물리치는등
세상을 주유하며 여러 선행을 했는데
여동빈은 세상에서 백여 세까지 지내다가 무창 황학루 3층 누각 위에서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후 신선이 된 후 여동빈은 걸핏하면 인간 세상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역대로 그가 인간 세상에 와서 세상과 사람을 제도한 전설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여동빈은 오른손에 도가의 파리채를 들고 있었으며
그의 문장인 검은 보통 등에 가로 차고 있습니다.
그는 서왕모에게 열 차례에 걸쳐 계속 유혹을 받았지만
잘 극복하여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검을 하사 받았습니다.
여동빈은 검을 차고 곳곳을 여행하여 용을 베고, 400년 이상이나
세상 여러 가지 형태의 악을 제거하였습니다.
△曹國舅(조국구)
-조국구(曹國舅)-
조국구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과 전설이 가장 적은데.
기록을 보면 그의 이름은 '우(友)', 자는 '경휴(景休)'이고
조후(曺后)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조후(曺后)는 송나라 인종의 계후(繼后)이며,
송나라 영종과 신종 시기에 16년간 황태후와 태황태후(太皇太后)를
지낸 여인입니다.
그런 연고로 흔히 습관적으로 '조태후'라고 부르며, 송나라 개국공신
조빈(曺彬)의 후예라고 합니다.
조국구는 왕족이긴 했으나 소탈 했으며 밑에 조이(曺二)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조이는 황실과 친척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남의 전답을
빼앗고, 남의 부녀(婦女)를 간음하는등 악한 짓만 골라 했다고 합니다.
동생의 악행을 보다 못한 조국구는 여러 차례 동생을 타일렀으나
조이는 형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 커녕 조국구를 죽이려고 하였고
조국구는 스스로 탄식하면서 "선을 쌓은 자는 창성하고, 악을 쌓은 자는
멸망한다.동생 조이는 이와 같이 온갖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 또한 재앙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재촉하는 종국을 생각해보니 수치스러울 뿐이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조국구는 집안의 재물을 다 털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아무런 미련도 없이 홀로 표연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국구가 심산에 홀로 은거하면서 수행한 지 수년이 지났후.
어느 날,두 사람의 세외 이인(異人)이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은 머리가 둥글고 이마가 넓으며 눈이 깊숙하고 입이
장방형을 한 충후(忠厚)한 장자(長者)와 같았고, 또 한사람은 호랑이
몸채에 용의 뺨을 한 도골선풍으로 무척이나 멋스러웠습니다.
이 두 명은 팔선 중의 종리권과 여동빈이었습니다.
두 신선은 조국구가 전심으로 수도하는 것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조국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두 신선이 또 묻기를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
조국구는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두 신선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마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도이다.
'도'에 대한 너의 이해는 참으로 투철하구나!"라고 하며.
조국구를 제자로 삼아 신선이 되는 수련을 지도하여 조국구도 드디어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관복과 관모를 쓰고 있는데,
한 손에는 그의 문장인 한 벌의 비파를 쥐고 있습니다.
그는 연예직 사람들의 수호 성인이며, 비파는 궁정에 자유로이
출입을 허가하는 궁정 패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왕족 출신이기 때문에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李鐵拐(이철괴)
-이철괴(李鐵拐)-
그는 쇠지팡이로 몸을 기대고 있는 거렁뱅이로 표상됩니다.
이철괴의 번명은 이현이며 다른말로 철괴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의 스승은 노자가 변한 신인 태상노군(太上老君) 이기 때문이며
필선중 가장 강한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이철괴는 원래는 상당히 미남이지만 추한 거지의 모습을 하게
된데에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주술에 있어 대단히 뛰어나 천계에 있는
노조(老子) 앞에 자주 부름을 받고 갔다고 합니다.
그가 영으로 그곳에 갈 때에는 외관상 죽어 있는 그의 육신을
자기 제자에게 맡겨 두었다고 하는데,
한 번은 여느 때와는 달리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육체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님으로 부터 다녀가라는
전갈을 받았던 그의 제자는 이번에야 말로 자기 스승님이 정말로
돌아가신게 틀림 없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스승님의 육신을 화장 지낸 후 집으로 갔습니다.
이철괴가 선계에서 돌아와 보니 그가 들어갈
육신이 없어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최근에 죽은 자가 없을까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근처 숲 속의 절름발이 거렁뱅이의 시신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로부터 그는 언제나 쇠지팡이를 발에 걸치고 걸객이 들고 다니는
호리병을 차고 있는 거렁뱅이로 표상됩니다.
그가 들고 다니는 호리병에는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육체로 부터 자유롭게 하는 그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의 문장은 걸객의 호리병이며 어떤 때는 바다게 위에 서있거나
사슴을 데리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韓湘子(한상자)
-한상자(韓湘子)-
한상자는 서기 820년경 살았던 유명한 학자 한유(韓愈)의 조카로
그의 성품은 방탕하고 구속을 싫어 하였고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음주를 즐겼습니다.
한유가 그를 학생들과 독서하라고 그를 입학시켰으나 한상자와
한원들과의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박에 빠지고, 한번취하면 2~5일동안 잠을 잤습니다.
한유가 보기에 한심하여 물었습니다.
'사람은 나름의 장점이 있다. 너는 장래 무엇이 되려고 하는냐?'
한상자가 말하길 '나도 일문의 기교가 있지요. 그걸 알지 못하는가요?'
라며 자신만만 하게 대답 했습니다..
한유가 뭐가 있냐고 묻자 한상자는 당시 한겨울인 정월초라
매우 추운 계절에 목란이 여러가지 색으로 피어나게 하였습니다.
또 화분에 흙을 채워 삽시간에 꽃을 피웠다 합니다.
이렇듯 그는 날때부터 식물과 얘기할수 있으며 꽃을 순식간에 자랐다
피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여동빈의 애제자였는데 여동빈이 그를 천도 복숭아 나무로
데려갔다가 거기서 떨어졌는데 천도 복숭아 나무가 힘을 주어서
그를 살려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문장은 퉁소이며 그는 음악가들의 수호성자입니다.
그는 나라 이곳 저곳을 방랑하며 퉁소를 불었는데,
감미로운 소리를 듣고는 새들과 금수들도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돈의 가치를 몰라 누가 돈을 주면 땅에 팽개치곤 하였습니다.
△藍采和(남채화)
-남채화(藍采和)-
성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이 안되는 신선 입니다.
일설에는 여장남자 였다는 설이 가장 많습니다.
남채화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으며 당나라 말기,
오대의 사람들은 그가 헤져서 너덜너덜한 남색 긴 장삼을 걸치고
성안과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 출몰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합니다.
남색장포를 입고 세 치나 되는 넓은 허리띠를 둘렀는데 그 허리띠는
자세히 다가가서 보면 먹으로 검게 물들인 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남채화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한쪽 발에는 비교적 괜찮은 가죽장화를
신었으나, 다른 쪽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고 하며
또한 보통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작열하는 무더운 여름에는 남색
장포안에 솜을 가득 넣어 두껍게 입고 다녔고 삭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는 너덜너덜한 홑겹의 장삼을 입고 다녔습니다.
괴상한 것은 여름에는 땀을 흘리지 않았고 겨울에는 도리어
온몸에서 열기가 솟아올랐다고 합니다.
남채화는 상당히 해학적인 선인으로 박자판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세상을 비꼬는 노래를 부르거나 노래를 하지 않을 때는,
그에게 농담을 거는 자들에게 한 마디씩 입에서 나오는 대로 던지는 말이
풍자가 있고 재치가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남채화가 거리를 활보하면서 불렀던 노래는 매우 많고도 다양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답답가(踏踏歌) 남채화(藍采和)'로
시작하는 노래이다.
답답가(踏踏歌) - 남채화(藍采和)
世界能幾何(세계능기하)
세계가 그 얼마이던가?
紅顔一春樹(홍안일춘수)
붉은 얼굴 한 그루 봄나무
流年一擲梭(유년일척사)
흐르는 세월은 한 번의 북질
古人混混去不返(고인혼혼거불반)
옛 사람들은 혼돈속에서 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今人紛紛來更多(금인분분래갱다)
지금 사람들 분분히 오는 이 많더라
朝騎鸞鳳到碧落(조기난봉도벽락)
아침에 난새와 봉황을 타고 하늘에 오르고
暮見蒼田生白波(모견창전생백파)
저녁에 바다를 보니 흰 파도가 인다
長景明暉在空際(장경명휘재공제)
햇볕은 하늘가에 오래도록 밝게 빛나는데
金銀宮闕高嵯峨(금은궁궐고차아)
금은 궁궐은 높아 우뚝하구나.
노래를 부르며 성안을 다니다보면 그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체화는 그 돈을 긴 끈에 꿰어 끌고 다녔는데 가끔 돈이 떨어졌으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줄에 꿴 돈을 전부 다 주었고.
돈 쓸 곳이 없으면 그 돈으로 술을 사서 마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남채화를 보았는데, 그들이 노인이 된 후에도
변함없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문장은 그가 들고 다니는 꽃바구니이며,그는 꽃장수들의수호성자 입니다.
△何仙姑(하선고)
-하선고(何仙姑)-
팔선(八仙) 중에서 유일한 여성입니다.
팔선도에서 연꽃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궁장여인이 하선고로 고대로부터
선고(仙姑)는 선녀 또는 여도사라고 하는 의미가 있고
선도(仙道)에서는 도고(道姑)라고 하고 민간에서는 선랑(仙娘)이라고 합니다.
전해져 내려오기로 하선고는, 당나라 사람으로 광주 남해군 증성현 출신입니다.
원래 이름이 하수고(何秀姑)였다고 하며 학자 하태(何泰)의 딸로서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에 출생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태어날때 자주색 구름이 집을 감싸고 흩어지지 않아,
상서러움을 더했다고 합니다.
하선고의 고향 인근의 산에는 운모(雲母, mica-흔히 돌비늘 이라고 하며
운모과 광석의 총칭으로서 결정체로, 색깔에 따라 성분이 다르며,
옛날 사람은 운모를 구름의 뿌리라고 하여 운모(雲母)라 이름하였습니다.
얇은 조각으로 잘 쪼개지며 빛을 투과하거나 거울로도 사용가능하며
약으로도 씁니다.
<도경연의본초>에는 “그 맛이 달고 평이하며 독이 없다. 몸에 사기를
제거하고, 오장을 편하게 하고 오로칠상과 허로를 다스리고 설사를 멎게 한다.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볍고 수명을 연장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흐르는 개울물에는 운모조각이 뒹굴면서 물을 따라 흘러 내려왔는데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떠내려 오는 운모조각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선고가 십사오세 쯤 되었을 때, 어느 하룻밤,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신선이 나타나 "너는 운모가루를 항상 먹도록 하라,
그러면 몸이 가벼워지고 수명도 연장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선고는 꿈속의 계시를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고.
매일 운모가루를 복용하였습니다.
그러자 과연 그녀의 신체는 가볍기가 제비와 같았으며,
미모와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부락민들은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운모가루를 찾아 먹었지만.일부 사람들만이 다소 효력을 보았을 뿐,
대부분은 효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선고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부모는 자연히 혼처를 구하면서
하선고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궁금 해했습니다.
그러나 하선고는 결혼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그녀는 집밖으로 멀리 외출을 하였을 때,
한 번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요괴에게 큰 위협을 받았지만,
여동빈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그의 주술적인 칼을 휘둘러
그녀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녀가 수련을 하고 있음을 알고 다른 팔선인 철괴리(鐵拐李)와
남채화(藍采和)를 소게 시켜 주었습니다..
그녀는 두신선에게 벽곡의 비결(음식이나 물을 전혀 먹거나 마시지 않고 사는 것) 을 전수받았습니다.
이후 하선고는 아침 일찍 외출하여 밤늦게 돌아왔다고 하는데 매번
돌아올 때마다 두 손에는 산에서 나는 큼직한 과일 한 아름을 가져왔습니다.
이 큼직한 산 과일은, 그 고장에서 나지 않는 과일로서 색깔이 곱고 신선하며
맛이 좋아 보통 과일과는 달랐습니다.
부모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묻자, 그녀는 "이곳으로 부터 천리밖,
오령(五嶺)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였고, 부모는, 이때서야 비로소
하선고가 근기가 높은 여자 수행자임을 알았습니다.
하선고는 날이 갈수록 수련의 깊이를 더하여 갔고,
부모들도 더는 하선고에게 시집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하선고의 도력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오래지 않아 측천무후도 하선고의 신통함과 기이한 행적을 듣고서
관리를 파견하여 하선고를 장안으로 불렀지만 그녀는 관리 일행과
함께 장안으로 오던 중에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파견 관리들이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실망하여
궁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측천무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나라 중종 경룡(景龍)년간에
신선 철괴리가 하선고를 인도하여 백일비승(白日飛昇)하여
신선의 반열(仙班)에 들었다고 합니다.
후에 당나라, 송나라 때 하선고는 장안 승선관(昇仙觀),
강서 마고단(痲姑壇)에서 현신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선고는 호남과 광저우 일대에서 대부분 활동하였는데 여자로서
성선(成仙)한 신선이 드문 가운데 하선고는 자연히 여성들에게
전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당광정이라는 여자가 몸에 혈질(血疾)이라는 병이 있어
연달아 8~9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습니다.
당광정은 스스로 전세의 죄업이 무거움을 알고는 자기 남편에게
수도하겠다는 뜻을 이야기하고 집을 떠나 천리길이 멀다하지 않고
하선고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송나라 때 이정신이라는 사람의 처가 임신을 했는데 출산일이
되었으나 아이는 나오지 못하고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선고를 청해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
하선고가 출산 현장에 와서 임산부에게 "당신은 일찍이 임신한
여종 한 사람을 학대하여 죽게 한 사실이 있다.
이제 그 업보를 받고 있다."고 하며 하선고가 법술을 써서
아이를 낳게 하였으나 세상에 나온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아이 몸 위에는 채찍 흔적이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 광주 증성현(增城縣)에는 하선고의 사당이 있고,
매년 음력 3월 7일 하선고의 탄신일이 돌아오면 4만여 읍민들이 모여
기념 창극을 하고 경축행사를 올리는 것이 풍속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문장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연꽃입니다.
때때로 그녀는 손에 파리채를 든 채 연꽃 잎사귀를 타고 떠다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육아와 가사를 잘 돌봐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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