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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貧黨(활빈당)

華谷.千里香 2016. 1. 29. 22:29

 

 

 

活貧黨(활빈당)

조선 후기 이래 농민들은 봉건적 수탈이 심화되어 생활터전을 빼앗기고,
무리를 지어다니면서 산간벽지에서 화전을 일구거나 양반부호가·
장시·행상인등을 습격.약탈하는 화적집단으로 변하기도 했다.
개항 이후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농민층 분화가 가속화되자
화적집단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들은 주로 빈농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확대된 화적집단은 점차 조직을 정비하여 단순한 화적질에서
의적(義賊)으로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했다.
특히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과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을 경험한 민족적·계급적 자각이 있었다.

이에 가난한 사람을 잘 살게 하는 집단이라는
뜻의 활빈당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통일·정비되었다.
활빈당 조직은 경기도·충청도 지방, 경상좌도, 경상도 서부,
전라도 동부 등지에서 각각 결성되어 연합체를 구성함으로써
상호 횡적인 연대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각 파의 내부 조직은 비밀결사의 종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조직관리를 위해 철저한 보안유지, 가명 사용,
조직 발설시 보복등 강력한 내규를 적용했다.
이들은 평소 10~30명 또는 40~50명 단위로 말을 타고
총·칼로 무장하여 떼지어다니며 양반부호가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일반 농민들 사이에 거주하거나 행상상인을 가장하여 활동했다.

활빈당은 구체적 요구사항으로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한사민논설(大韓士民論說) 13조목을
내외에 천명하고, 양반부호가의 습격·약탈, 관청습격,
외국인에 대한 보복·약탈을 했고, 때로는 수적(水賊)이 되어
바다에서 상선을 습격·약탈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관청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탈취하거나
통도사.범어사 등의 대사찰이나 장시를 습격하기도 했다.

활빈당은 빼앗은 재물을 빈민이나 영세소상인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는데,
활빈당의 반봉건 투쟁과 각지에서의 활빈행위는 민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과 경찰의 무력탄압으로 지도부가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일부는 농민무장대의 형태로 활동을 계속했고,
일부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만들거나 다른 의병부대에
흡수되어 항일 의병전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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