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불교)

三大 觀音祈禱 道場(삼대 관음기도 도량)

華谷.千里香 2013. 4. 10. 10:27

 

 

 

 

 

三大 觀音祈禱 道場(삼대 관음기도 도량)

 

▲양양 낙산사 홍련암
홍련암은 의상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인 관음굴 위에 지은 암자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은 홍련암은 창건 당시부터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낙산사가 있는 산 이름을 낙산(洛山)이라 한 것은 천축의 보타(寶陀)란

낙가산(洛伽山)에서 딴 것이라 하며, 이 낙산 동쪽 바닷가에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굴이 하나 있는데, 이 굴은 '대관음보살인 백의(百衣)보살이

거처하던 성지'라고 한다.

이곳은 항시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파도가 심하여 일찍 아무도 들어가 본

사람이 없는 곳이기에 불교의 성지로 널리 알려졌다.


강원에 양양 낙산에 성지가 있다는 말이 퍼지자 의상대사가 이 성지에서

관음보살에게 예불하려고 찾아왔다.

대사는 이곳에 와서 사람을 시켜 바닷물에 돗자리를 깔게 하고

목욕재개를 한 다음 그 돗자리에 올라앉았다.

그랫더니 바닷속에서 여덟마리의 용이 나와 대사를 모시고 굴 속으로 들어갔다.


굴속에 들어간 대사는 그 안에 안치되어 있는 부처님께 예불을 하니 공중에서

수정염주가 내려오기에 그 염주를 받아가지고 굴을 나왔다.

그러자 동해의 용이 여의주 한알을 바쳐 그것도 받아왔다.

의상대사가 다시 7일동안 재계하니 비로소 관음의 진신을 보게 되었다.

관음보살은 "앉은 자리 위 산꼭대기에 한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전했다.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빚어 모시니 그 원만한 얼굴과 고운 모습이

천여스러웠다.

그리고 그 대는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거주하는 곳임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대사는 그가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강화 낙가산 보문사

인천 강화군 삼산면(三山面) 매음리(煤音里) 낙가산(洛伽山)에 있는 절.
635년(신라 선덕여왕 4)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던 회정(懷正) 선사가

강화도에 와서 산세를 살펴보니 인도의 보타락가산과 비슷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보문’, 산 이름을 ‘낙가’라고 했다. 낙조에 붉게 물드는

마애관음보살상의 모습은 관음진신 바로 그것이다.


635년(선덕여왕 4)에 회정(懷正)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649년(진덕여왕 3)

에 어부들이 불상과 나한 ·천진석상 22구(軀)를 바다에서 건져내어 천연석굴

안에 봉안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설치하고 천연동굴 내에 반월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하였는데, 탱주 사이에 21개의 감실(龕室)이 있어 거기에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석실은 지방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1928년에는 절 뒤편 절벽에 높이 32척 너비 12척의 관음상을 새겼다.

이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은 지방 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 금산 보리암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065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 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 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인천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신도들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 보리암의 두 가지 사찰 연기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아들인 인도 중부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장유선사가 세웠다고 하는 설화다.

장유선사는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다.

그런데 중인도의 아유타국 공주가 허씨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아유타국이 멸망하여 인도와 인접해 있는 중국으로 옮겨와 있을 때,

중국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공주의 삼촌인 장유선사가 인도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 사이에서 열 왕자를 낳았는데 그중 일곱 왕자를

장유선사가 데리고 출가를 했다는 것이다.

일곱 왕자를 데리고 출가한 장유선사가 거쳐간 곳은 영남일대에

많이 있는데 김해의 장유암은 그 확실한 사적지이고,

가야산과 지리산의 칠부처가 모두 장유선사의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장유선사가 처음 찾아든 곳이 가락국이 자리잡고 있는

김해에서 멀지 않은 이 금산 보리암이라는 것이다.

장유선사는 금산의 천태망상의 변화에 매혹되어 보리암에 터를 잡아

아유타국에서 모시고 온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지금의 관세음보살이

바로 그때의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효대사 창건설이다. 의상과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행하다가 이산의 승경에 끌려 들어 왔는데,

온 산이 마치 방광(防光)하는 듯 빛났다고 한다.

초옥을 짓고 수행을 하던 원효는 이곳에 보광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보광사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감사의 뜻에서 사찰을 둘러싼 산의 이름을 금산이라 부르게 했으며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 도를 이루었다는 뜻의 '보리'
남행의 벽파(碧波)에 발 등을 씻으며, 허리에 구름띠를 두르고 서 있는

금산의 이마에 자리잡고 앉아, 망망한 남해의 하늘 끝을 내려다 보고 있는

보리암의 '보리'는 '깨달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유서 깊은 사찰들은 대부분 깊은 산속의 울창한 산림 속에 세워져 있는데,

보리암은 유독 신선들만이 내려 쉬었을 것으로 느껴지는 금산의 영봉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보리암에는 기단석 위에 나침반을 올려 놓으면 불가사의한 '자기난리'가 일어나는 삼층석탑이있다.

이 탑은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싣고온 파사석으로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탑의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탑 맞은편에 상주 해수욕장과 망망한 대해를 은은한 미소로

내려보고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해수관세음보살은 우리 민족에게       만 숭상되어 온 관음보살으로 알려져 있다.

해수관음보살은 보리암에 오는 많은 중생들이 소원을 풀기를

바라는 뜻에서 모신 것이다.


* 관세음보살 모시는 '구원의 도량'
보리암은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영험스럽고 자비스런

기도 도량으로 소문난 사찰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지만 구원의 종교인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려운 수행에 힘쓰지만

대부분의 중생은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님이나 보살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중생의 깨달음을 도와주는 불보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널리 숭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늘 외우고 항상 마음속에

새겨서 공경하고 예배하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되며

현세에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음신앙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퍼져

나가기 시작해 서기6세기 말에는 신라 백제등 삼국에 모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 시기부터 관음보살상이 대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관음신앙의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3대 성지, 즉 3대

기도도량은 남해 보리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이다.

이들 세 곳은 모두 신비한 창건 설화와 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내려 오며 오늘날에도 불교 신도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기도도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