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施物(시물)

華谷.千里香 2016. 12. 19. 14:01



施物(시물)

천주교 신부나 스님들, 혹은 원불교 원사님들은 농부나 어부,

노동자들 처럼 무엇을 가꾸고 기르는 生産者(생산자)가 아니다.

가정을 꾸려 자식을 길러 子子孫孫(자자손손)대을 잇게 해주는 사람들도 아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중생의 덕을 입고 백성의 보살핌을 받고

사는 자들이요, 절대 소비자들이다.

그래서 신부님이나 스님들, 원사님들은 중생

혹은 백성들이 갖다 바치는 것을 먹고 입고 쓰며 산다.

이렇게 갖다 바치는, 혹은 하늘과 사람이 내려주는

모든 것을 施物(시물)이라 한다.

베풀 시(施)에 물건 물(物)자를 쓰며, 이를 헌금 또는 寄附(기부)라고도 부른다.
 

이 施物(시물)을 바치는 자는 부자만이 아니다.

때론 가난한 사람들이, 때론 억울하고 한 많은 사람들도, 늙은 노인도

어린 아이도, 한결같이 세상의 평온과 求福(구복)을 바라면서 내는 것들이

모두 施物(시물)의 범주에 든다.


이 施物(시물)에 대해,

어느 책에서 읽은 사명대사의 入山記(입산기)가 문득 떠오른다.

산길을 가다 보니 왠 중이 헐레벌떡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곁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인 일인고 싶어 지켜보니,

그 중은 계곡물에서 배춧잎 하나를 건져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 중은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내가 그 중이 간 길을 따라 가 보니 암자가 나오고,

거기까진 무려 십리나 되는 길이었다.

내가 그 중에게 물었다.

“십리나 되는 길을 고작 배춧잎 하나 주우려고 내려 오셨습니까?”

그러자 그 중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세상이 내리는 모든 것이 施物(시물)이거늘,

중이란 무릇 공짜로 그것을 먹고 사는 자들이다.

어찌 배춧잎 하나라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더냐.”

나는 그 말을 듣고 입산을 결정하였다.


중이란, 무릇 공짜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중이 되려면 배춧잎 하나라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소위 수도자의 기본 자세라는 것이다.

천주교 신부도 원불교 원사들도 예외일 수 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한 마디로 平凡(평범)의 진리,求道者(구도자)의 진리였다.

그러나 세태가 변하여서인가. 아니면 내가 어리석어서인가.

수도자들이 수도에 힘쓰지 않고  세속인들 보다 오히려 수많은

재화를을 쓰고,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위 백성들이 바치는 것을 먹고 산다는 사람들이

그 백성들 위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스탕달은 그의 소설 적과 흑에서, 중세 유럽의 온갖 부정부패,

피의 음모에 신부들이 있음을 고발하였다.


고려는 중들의 세상이었다.

온갖 악의 현상에 중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중을 천민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현 대한민국에 그때의 신부들, 중들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부의 검은 옷은‘세상과의 단절’곧 신부는‘죽은 자’의 상징이다.

중들의 削髮(삭발)은 세상과의 단절, 즉 絶緣(절연)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신부들과 중들은 모두 세상과 혹은 이념과 결탁되어 있다.

사명대사와 배춧잎. 그리고 소위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

우리의 施物(시물)을 받아 먹는 자라면,

우리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들은  이미 본분을 잊고 사는 사람들일 것이고,

많은 재화를 쓰고 사니 배고픈 수행자들이 아니다.

聖職者(성직자)가 아니라 世俗人(세속인)이고,

존경을 받는 자가 아니라 경멸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다.


그러니 요즘 신부들이나 스님들이

사명대사의 일화 속에서 배우는 이런 平凡(평범),

즉 기본을 갖춘 求道者(구도자)의 진리를 아는가 모르겠다.